국립발레단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담 캐플릿’ 윤혜진
국립발레단의 발레극 ‘로미오와 줄리엣’의 여운이 짙다. 지난달 27~30일 5차례 공연 동안 유료 객석점유율 98%를 기록했다. 주말 공연은 전석 매진됐다. 정통 클래식 발레가 아닌 모던 발레로는 매우 이례적이다. 지휘자 정명훈이 이끄는 서울시립교향악단과의 협연도 인기에 한몫했다.국립발레단 트위터에는 “지휘자가 춤추고 무용수가 연주했다.”는 등 격찬이 쏟아졌다. 이번 공연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독특한 캐릭터다. 대개 애정 스토리의 바탕에는 ‘오빠 믿지?’가 깔려 있다. 그런데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를 ‘누나 믿지?’로 뒤집었다. 사랑 앞에 두려움 없는 줄리엣이다.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1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만난 윤혜진. 머리를 짧게 깎아 미소년처럼 보인다. 성격도 털털해 누나, 언니보다 형, 오빠 소리를 많이 듣는다며 웃는다.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귀족적이고 도도하면서도 은밀하고 섹시하기까지한 마담 캐플릿을 멋지게 소화해낸 윤혜진(31)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를 1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만났다.
이제 막 공연이 끝났는데 2일부터 곧바로 ‘지젤’ 지방공연에 투입된단다. 지칠 법도 한데 쾌활한 모습이다.
→발목이 안 좋은 상태라고 들었다. 캐플릿이 도도한 캐릭터라 발목에 더 무리가 간 것 아닌가.
-모던 발레는 스토리에 맞춰 자연스럽게 연기하면 되기 때문에 오히려 더 편하다. 그런데 내일부터 또 공연하러 가야 해 큰일이다. 발목 치료도 받고 영화 보고 연애도 해야 하는데…. 하하.
→실제로 보니 키가 의외로 그렇게 크지 않다.
-170㎝다. 2001년에 국립발레단에 입단했는데, 그때만 해도 너무 커 상대역 구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지금은 다들 크니까….
→캐플릿 부인 캐릭터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숙모 믿지?’다. 너무 세서 부담 됐을 것 같다.
-하하. 2008년 ‘신데렐라’ 때 못된 계모 역을 했다. 즐기면서 했는데 반응이 의외로 너무 좋았다. 아, 이거구나 싶었다. 2002년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때 군무를 했는데 그땐 줄리엣 한번 해보면 소원이 없겠다 싶었다. 지금은 그런 생각 안 한다. 내 캐릭터는 캐플릿이다. 신데렐라의 계모는 그냥 못됐지만 캐플릿은 도도하고 섹시하기까지하다. 내가 (발레극) ‘백조의 호수’에서 예쁘고 가녀린 척한다고 생각해 봐라. 손발이 오글거린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마담 캐플릿을 맡아 강한 카리스마를 보인 윤혜진.
-(이런저런 주연을) 다 해봤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내려놓을 수 있는 거 같다. 꼭 주인공이 아니더라도 작품의 중심을 잡아주는, 강인한 솔로 캐릭터가 더 탐난다. 주역은 주역이니까 박수를 받을 때도 있지만, 솔로는 캐릭터를 정말 잘 살려냈을 때만 박수 받기 때문이다.
→아버지(원로배우 윤일봉)가 서운해하지 않나.
-솔직히 가장 마음에 걸리는 대목이다. 아무래도 딸이 예쁜 역 하길 바라지 않겠나. 줄리엣 엄마 역할이라고 했더니 아버지께서 “노역이냐?”하고 물으셨다. 노인 분장할까봐 걱정되신 모양이더라.
→윤혜진의 캐플릿과 김주원의 캐플릿은 상당히 달랐다. 베르니스의 지도는 어땠나(안무자 장 크리스토프 마이요의 연인이자 모나코 몬테카를로발레단 주역 무용수인 베르니스 코피에테르가 이번 연기 지도를 맡았다. 국립발레단의 또 한명의 수석 무용수인 김주원은 세 차례 공연에서는 주인공 줄리엣, 두 차례 공연에서는 캐플릿 역을 맡았다).
-베르니스는 맞춤형 지도를 했다. 김주원에게는 우아한 캐플릿을, 내게는 강인한 캐플릿을 요구했다. “너의 스트롱한(강한) 면을 살리라.”고 끊임없이 주문했다. 자신은 무대에서 춤 출 때 스스로 대사를 지어내 읊는다며 팁도 알려줬다. 저도 그렇게 했다. (티발트를 죽인 로미오를 생각하며) 이 나쁜 놈 하면서…(웃음).
→섹시함도 중요했을 것 같다. 절제하지 못하면 이상하게 보일 수 있으니까.
-맞다. 다리를 얼마나 노출할 것이냐를 두고도 의상팀과 고민했다. 너무 많이 보이면 천박하고, 너무 적게 보이면 덜 섹시하고. 귀족 부인이라 온몸을 쓰기보다는 조금만 움직여도 관객이 알아챌 수 있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눈빛으로 전달하려 했다.
→음악 얘기도 빼놓을 수 없다. 정명훈의 연주, 무용수로서 어땠나.
-최고였다. 드라마틱한 감정 연기가 핵심인데, 춤 추기 전 음악이 시작될 때부터 눈물이 날 정도였으니까(코피에테르조차 “내가 무대에 올라 저 음악에 맞춰 춤추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앞으로도 드라마틱한 작품을 할 생각인가.
-춤뿐 아니라 연기가 함께 가는 작품, 그런 걸 해보고 싶다. 마이요 작품도 좋고 (체코 출신 안무가) 지리 킬리안 작품도 좋다. 안 그래도 마이요가 ‘백조의 호수’를 모던하게 재해석한다던데 (성사되면) 로트발트(오데트 공주를 백조로 만드는 악의 마법사)역을 꼭 해보고 싶다. 지금까지 똑같은 ‘백조의 호수’를 100번도 넘게 하면서 좀 다른 건 없나 푸념했는데 마이요도 같은 생각을 했나 보더라(웃음).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2011-11-02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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