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 방한때 정약종·약용 후손 대표로 시복미사 참석 규혁·호영씨
”천주쟁이란 소리를 또 들으면 죽는 거나 마찬가지니 족보에서도 조상을 파내고 대대로 숨죽이고 살아 왔지요. 시복식을 한다니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습니다.”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 사는 정약종·약용 가문의 후손인 정규혁(88)·호영(54) 씨는 요즘 8월16일을 손꼽아 기다린다. 8월16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리는 천주교 순교자 124위의 시복미사에 순교자 후손 대표단으로 참석해 교황 프란치스코를 만나기 때문이다.
규혁 씨는 정약종의 방계 4대손, 호영 씨도 정약종 가문의 7대손이자 다산 정약용의 직계 장손이다.
30일 남양주 마재성지에서 만난 호영 씨는 “정약종 할아버지는 1801년 신유박해 이후 족보에서 사라졌다가 1961년에야 이름이 등장한다”며 “천주학쟁이 집안이란 게 알려질까봐 조상 대대로 조심조심 살아올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아버지가 옛 경기도 광주 목사로 부임하면서 이곳에 자리잡게 된 나주 정씨 집안은 천주교와 깊은 인연을 맺는다. 4형제 가운데 맏이 약현만 빼고 약전·약종·약용 모두 신앙을 갖게 됐다.
정씨 형제들은 18세기 후반부터 집안에서 보관 중이던 천주교 교리서 ‘천주실의’를 읽기 시작하면서 천주교와 인연을 맺기 시작했다. 천주실의는 마테오 리치가 쓴 한역 서학서다.
이들 형제 말고도 초기 한국 천주교의 기틀을 세운 이벽, 한국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 황사영 등이 이들 가문과 친인척 관계로 얽혀 있다.
특히 이번에 시복식에서 둘째 아들 철상과 함께 복자로 선포되는 정약종의 경우 1984년 시성된 부인 유조이, 큰아들 하상, 딸 정혜까지 일가족 5명이 모두 순교했다.
정약종은 ‘한국천주교 평신도의 교부’라 불린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처음 접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2년 뒤인 1786년 형 약전에게서 교리를 배우면서부터였다. 천주교 교리를 깊이 이해하게 된 그는 가족과 이웃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794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그를 도와 교회 일에 힘썼다.
오랜 시간에 걸친 교리 연구를 바탕으로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 2권을 펴냈고, 주 신부가 조직한 평신도 단체 ‘명도회’ 초대 회장도 맡았다.
그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체포돼 의금부로 압송된 뒤 보름 동안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교회나 교우들에게 해가 되는 말은 한마디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천주를 높이 받들고 섬기는 일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고 꼿꼿한 자세를 지켰고, 서소문에서 참수되는 순간에도 “땅을 내려다보면서 죽는 것보다 하늘을 쳐다보며 죽는 게 낫다”며 하늘을 우러르며 순교했다.
실학을 집대성한 학자로 잘 알려진 약용 또한 ‘세례자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갖고 10여 년간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제사 문제에서 비롯된 1791년 신해박해 때도 교회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795년 당쟁으로 좌천되면서 반대파의 원성을 가라앉히기 위해 자명소(自明疏)를 올린다. 천주교를 떠났다는 것을 글로써 명백히 밝힌 것이다.
이어 신유박해 때 배교(背敎)로써 죽음을 면하고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떠난다. 18년간의 유배생활 도중 신심을 되찾고 1811년에는 교회재건 운동에 간접적으로 참여했고, 유배에서 돌아온 뒤에는 묵상과 기도로 일관하다 중국인 유방제 신부에게 병자성사를 받고 세상을 떠났다고 전해진다.
이런 박해 속에서도 정씨 가문은 대를 이어가며 꿋꿋이 신앙을 지켜왔다. 벼슬을 못하는 양반은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어떤 경우는 보름 가까이 밥을 짓지 못한 일도 있었다고 규혁 씨는 전했다.
정씨 집안의 신앙 정신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마재성지를 30년 동안 지켜온 규혁 씨는 “조상들은 천주쟁이라는 낙인이 찍히고도 결코 신앙을 놓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나 할머니들은 한겨울에도 매일 새벽 얼음을 깨고 찬물로 몸을 정결하게 한 뒤 아침기도를 올렸다”고 말했다.
호영 씨는 “정씨 집안과 한국천주교는 조선후기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생각한다”며 “시복식과 교황 방한이 신앙을 떠나 개인과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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