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이한음 옮김 /살림/576쪽/2만 8000원
진정한 사기꾼은 남을 속이는 자가 아니다. 자신이 하는 말과 행동을 진짜라고 믿는 사람이다. 타인을 감쪽같이 속이려면 자기가 먼저 속아야 한다는 점을 간파한 자기기만(Self-deception)술의 천재라 할 수 있다. 자기기만은 비단 사기꾼이나 거짓말쟁이에 국한되는 현상이 아니다. 인간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누구나 자기기만 행위를 한다. 개인 차원을 넘어 집단적인 자기기만 행위도 역사적으로 심심찮게 벌어져 왔다.
서울신문 포토라이브러리
위안부 망언을 비롯한 일본의 반복되는 과거사 왜곡은 자기 정당화로 포장한 집단적 자기기만의 대표적 사례다. 사진은 서울 중구 중학동 주한일본대사관 앞에 설치된 위안부 소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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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생물학자인 로버트 트리버스의 이 책은 ‘인류의 아이러니’인 자기기만을 진화론적 관점에서 통찰한 보고서다. 트리버스의 저서가 국내에 소개되는 것은 처음이지만 그는 호혜적 이타주의, 양육투자, 성비결정 등에 관한 진화적 분석으로 학계에서 업적을 인정받은 인물이다. 특히 리처드 도킨스의 출세작 ‘이기적 유전자’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저자는 자기기만이 남을 속이기 위해 진화한 것이라고 본다. 속이는 행위가 늘어날수록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속임수를 간파하는 능력이 함께 발달했고, 이러한 기만과 간파의 경쟁이 인류의 지능 향상에 기여했다고 파악한다. 하지만 남을 속이려면 그만큼 마음에 부담감과 두려움을 안게 된다. 그래서 자신조차 속이는 자기기만 능력이 방어 전략으로 진화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저자에 따르면 자기기만 성향은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학자들의 94%는 자신이 속한 분야에서 상위 절반에 속한다고 확신하고, 미국 고교생의 60%는 리더십 면에서 자신이 상위 절반에 속한다고 확신한다는 연구 결과가 이를 뒷받침한다. 자기 자신을 실제보다 더 매력적이고, 더 도덕적이며, 더 뛰어나다고 여기는 이러한 자기기만은 ‘과신’과 ‘무의식’의 토대에서 자라난다.
자기기만에 대한 진화론적 이론을 나열한 전반부는 다소 지루하지만 자기기만의 실제 사례를 제시하는 후반부는 속도감 있게 읽힌다. 저자는 자기기만이 초반에는 행복감과 약간의 편익을 주지만 결국에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사실을 다양한 층위의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무엇보다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조직적, 국가적 차원에서 행해지는 집단적 자기기만이다. 전략이 위험하다는 점을 인지했음에도 기업 최고경영자의 강력한 주장에 밀려 일을 추진하다 위기에 처하거나 조종사와 부조종사가 눈앞의 위험을 막연하게 회피하려다 발생하는 항공 사고 등은 자기기만의 폐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집단적 자기기만의 최악의 사례는 역사 왜곡이다. 저자는 미국의 편향된 건국사,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왜곡된 갈등, 터키의 아르메니아인 대량 학살 부인과 더불어 일본의 위안부 부정을 ‘역사적 기억 상실증’과 ‘강요된 거짓’으로 가득한 거짓 역사 서사의 주요 사례로 설명한다.
저자는 “(기만과 자기기만의)질병은 모든 인류 집단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어느 누구도 이 병에 면역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서 “과신과 무의식을 피하려고 노력해야 하고, 쉽지는 않겠지만 자기기만에 빠질 위험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순녀 기자 coral@seoul.co.kr
2013-08-03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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