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자 전국에 산재해 치료에 어려움...치료위해 모텔 전전하기도 안산트라우마센터 5년간만 운영…장기적 치료대책 마련 필요
세월호 1주년을 앞두고 사람들은 점차 사고 충격에서 무뎌지고 있을지 모르나 사고 생존자들은 4월 16일이 다가올수록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이 더 생생해진다.발밑으로 사라진 친구들의 모습, 비명, 놓쳐버린 손. 그때의 기억이 고스란히 꿈속으로 덮쳐 온다. 악몽 꾸는 날이 다시 늘었고 집 밖으로 나가고 싶지도 않다.
생존자들을 무기력함으로 이끄는 것은 공포도 슬픔도 아닌 죄책감이다. 나 혼자 살아 돌아왔다는, 친구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말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세월호 논란 속에 생존자와 유족들의 심리치료는 갈수록 더뎌지고 있지만 장기적인 치료지원은 불투명해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이제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불쑥 찾아온 기념일 반응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안산온마음센터) 위탁운영병원인 고대안산병원 정신의학과 윤호경 교수는 여객선 세월호에서 살아 돌아온 단원고 학생 등 생존자 10여명을 지난 1년간 꾸준히 치료하고 있다.
환자의 심리상태에 따라 일주일에 한 번에서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상담을 하는데 지난달 들어 비교적 안정을 찾던 학생 중 일부가 ‘힘들다’며 병원을 찾는 횟수가 부쩍 늘었다.
”한동안 잊고 살던 학생들이 불현듯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다고 해요. 이맘때쯤 수학여행을 가다 사고를 당해서 그런지 길가다가 활짝 핀 꽃만 봐도 그날이 생생해진다고 합니다. 기념일 반응이 온거죠.”
기념일 반응이란 특정한 시기에 발생하는 심리적·신체적·행동적 반응으로 트라우마가 남을 정도로 충격이 큰 경험을 겪었던 시기가 다가올 때 나타나는 우울·불안·신체적 통증을 뜻한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를 겪은 환자들에게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증상이지만 제대로 극복하지 못하면 극단적인 분노표출 등 심각한 문제로 번질 수 있다.
이에 병원 측은 심리상태가 불안정한 생존자들에게 우울증치료제를 이용한 약물치료나 입원치료를 권유하고 있으나, 일부는 죄책감에 이마저도 거부하고 있다.
단원고에서 1년째 학생과 교사를 대상으로 심리치료를 하는 김은지 스쿨닥터(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단원고 생존 학생 중 사고 이후 6개월 이상이 지나서야 외상 후 스트레스나 정신 장애가 나타난 경우도 있다”면서 “따라서 당장에 증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사고 피해자들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김 전문의는 또 “세월호 충격 직후 안정과 보호를 필요로 하는 시점에 보호자나 당사자에게 충분한 설명이나 동의 없는 일방적인 언론 취재로 불안과 분노를 자극했고, 아직도 아이들의 뇌리에 생생히 남아 있다”면서 “트라우마 후 세상이 안전하지 않고, 나는 보호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상황에서 과도한 취재는 이런 부분을 가중시킬 수 있는 만큼 언론의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 생존자 대부분 전국 곳곳 흩어져…치료 강제할 수 없어
세월호 사고에 따른 심리치유 대상은 생존자(일반 승객·단원고 학생 및 교사)와 유족 및 친인척이다. 고대안산병원이 위탁운영하는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온마음센터)가 중심이 되어 정신과 전문의료진과 상담인력 총 35명이 이들의 치료를 맡고 있다.
심리치료는 기본적으로 강제사항이 아니라 환자의 자발적인 참여로 진행된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다면 치료를 강제할 수 없다는 말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고대안산병원에서 정기적인 치료를 받는 단원고 생존학생은 절반가량에 그친다.
피해자가 많았던 제주도에 거주하는 생존 승객의 경우에도 11명 가운데 5∼6명만이 고대안산병원에서 1년째 치료를 이어가고 있다. 모두 화물차운전기사가 직업인 이들은 외상후스트레스장애 때문에 지난 1년간 한 번도 운전대를 잡지 못하고 고대안산병원 인근 모텔을 전전하며 치료에 매진하고 있다.
제주도에도 심리치료 기관이 있지만 세월호 사고와 관련한 경험과 의학적 자료가 충분한 의료진이 안산에 집중된 탓에 일주일에 한두 번씩 제주와 안산을 오가는 힘든 여정에 몸을 맡기는 실정이다.
10여명이나 되는 승객을 구했다가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끝에 지난달 19일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 했던 ‘구조영웅’ 김동수씨도 이들 중 한명이다.
나머지 일반승객 생존자는 전국에 뿔뿔이 흩어져 있어 치료현황조차 파악되지 않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 “자식 먼저 보낸 죄인”…갈길 먼 유가족 치료
희생자 유가족에 대한 치료도 더디기만 하다. 안산트라우마센터는 단원고 희생학생 부모를 중심으로 지속적인 가정방문이나 전화로 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했지만 세월호 사고 후 수개월 동안 유가족은 “자녀를 먼저 보낸 부모가 치료는 무슨 치료냐”며 거부해왔다.
그나마 사고발생 1년이 다되면서 유가족들 사이에서 자발적으로 치료를 받기 위해 센터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는데, 최근 들어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을 둘러싼 사회적 논란이 불거지면서 치료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유족들이 “세월호 사고 진실규명과 여객선 인양만이 유족들을 치유하는 길”이라며 또다시 외롭고 힘든 싸움에 나섰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트라우마센터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치료의 지속성을 위해 전문 상담인력과 의료진을 유족들이 가는 곳마다 배치해 만약의 상황에 대비하는 것이다.
채정호 서울성모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보통의 경우 사고 1년이 지나면 생존자와 유가족들이 새롭게 살아가는 시작이 되지만, 아직도 세월호 사고는 정상적인 치유과정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진단했다. 아직 매듭짓지 못한 세월호 관련 정치, 사회적 논란이 이들의 트라우마 치료를 좋지 않은 방향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이다.
안산에 거주하지 않는 일반승객 희생자 유족들의 치료 현황은 더 열악하다.
장종열 일반인 희생자 유가족 대책위원장은 “참사 초반엔 일대일 심리 상담이 이뤄졌으나, 가족이 그렇게 된 마당에 심리치료 받을 상황이 아닌 것 같아 곧 거절했다”며 “대부분 일반인 희생자 유족이 심리치료를 받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 안산트라우마센터 한시적 운영…”장기적 치료지원 불투명”
외상후스트레스장애는 통상 충격적인 사고나 사건을 겪은 지 6개월이 지나고 나서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수년간 지속된다.
정신질환이 대부분 그렇듯이 PTSD도 증상 지속기간이 ‘1∼2년’, ‘5년 미만’ 등과 같이 특정되지 않아 진료기록에도 ‘부정기’ 질환으로 기재된다. 10년 후, 20년 후에라도 갑자기 도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현재 논의되고 있는 세월호 배·보상 특별법 및 시행령에 따르면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과 생존자에 대한 심리치료 지원은 5년까지만 가능하다.
세월호 사고에 따른 심리치료제공을 목적으로 설립된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도 5년간만 운영될 예정이다.
한창우 안산트라우마센터장은 “트라우마 치료는 몇 년 안에 끝낼 수 있는 질환이 아니기 때문에 장기적인 치료와 관찰이 필요하다는 의료진의 의견을 수차례 정부 측에 전달했지만 지금 분위기로는 모두 반영될 것 같지 않다”고 우려했다.
단원고 생존학생 학부모들도 생애 전주기에 걸친 치료를 책임져 달라고 호소했다.
장동원 세월호 생존학생 학부모 대표는 “보상금은 주지 않아도 좋다. 우리가 정부에 바라는 것은 딱 하나다. 언제 어떤 식으로 문제가 표출될지 모르는 우리 아이들의 치료가 지속할 수 있도록 해주길 바랄 뿐이다”라고 강조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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